오랜 시간 같은 곳을 보고, 같은 일을 하며 살다보면 보는 시선이 늘 똑같아진다. 이렇게 매일 똑같은 것들이 반복되다 보면, 새로운 시선이 필요할 때가 온다. 그럴 때는 아예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따뜻한 기운이 감싸는, 길목마다 먼저 핀 노란 산수유와 매화가 반기는 경남 양산에서 새로운 계절을 만났다. 도시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계절이 주는 새로움에 눈도, 마음도, 생각도 괜스레 환기되는 기분이다.
매해 이맘때쯤이면 으레 꽃샘추위가 오겠거니 하고, 겨울옷을 늦게 정리하곤 한다.
낮에는 잠깐 따뜻해진 날씨에 ‘이제 봄이구나’ 싶다가도, 다시 저녁이면 ‘봄은 무슨’이라고 되뇌며 옷을 여민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날씨에 또 데이기 싫어서 두툼한 옷을 입고 경남 양산으로 갔다. 그래도 아래 동네는 조금 따뜻해 하나 둘씩 봄꽃을 보러 몰려든다기에, 많고 많은 봄꽃 중에 조금은 특별한 그리고 본 적 없는 홍매화를 보고 싶었다. 사실 양산 통도사에 수령 350년이 된 홍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솔직한 이유긴 하지만.
KTX를 타고 울산(통도사)역에 내렸다. 택시를 타고 통도사로 향하는 길이 아직은 좀 휑한 느낌이 강해서 ‘홍매화가 피었으려나?’ 싶었지만, 가는 길에 만난 산수유와 매화를 보니 홍매화를 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15분쯤 지났을까. 입구에서 매표를 하고 통도사 제2주차장에 도착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홍매화가 피었다는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대한민국의 사찰이라면 으레 높은 언덕길을 오르고 올라, 마주하는 줄로만 알았던 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통도사에 와서 깨달았다. 이 말은 즉, 통도사는 평지로 이루어졌다는 소리다. 숨 가쁘게 오르지 않아도 되어서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쉬엄쉬엄 걸었다.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한다고 해서 통도사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통도사의 계단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규범인, 계율을 받는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장소. 금강계단의 종 모양 석조물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부처의 신골)를 모셔두었는데 수행자들이 부처님께 직접 계율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삼국유사>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도 해서 통도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로 손꼽히게 되었단다.
유구한 역사를 품은 통도사의 이야기를 알게 되니, 통도사 곳곳에서 세월을 견디고 지금에 이른 보물들이 보였다.
금강계단, 대웅전, 웅진전, 용화전, 봉발탑, 영산전 벽화 등 통도사의 보물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중 이 계절과 어울리는 보물을 꼽아보라면 단연 홍매화를 들고 싶다. 통도사의 역사와 함께한 수령 350년이 된 그야말로 자연과 세월이 준 보물이기 때문이다.
귀하디 귀한 보물, 통도사 홍매화의 이름은 자장매(慈臧梅). 1650년 전후 즈음에 통도사의 스님들이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매화나무를 심었고, 그의 호를 따서 ‘자장매’라고 이름 붙였다고. 통도사 대가람의 경내 영각 오른쪽 처마 밑에서 그 위엄을 뽐내고 있다.
통도사에는 자장매만 있는 게 아니다. 자장매 외에도 두 그루의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름은 만첩홍매와 분홍매다. 일주문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만첩홍매와 분홍매 두 그루가 바로 그것. ‘흐드러지게 피었다’라고 말할 순 없지만, 아직 곳곳에 완연한 봄의 경치를 누릴 수 없어서인지 사람들은 통도사의 홍매화 곁으로 모여들어 사진 찍기에 바빴다. 줄어들 기미 없이 홍매화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에 통도사에 봄이 왔음을 알려거든, 홍매화를 보면 되겠구나 싶었다.
잠시 사람들을 피해 홍매화에 가려져 관심이 덜한 새순을 틔우는 매화나무, 빨간 모습을 보이는 동백나무를 살피며 통도사 깊숙한 곳까지 걸었다. 선선한 바람과 햇볕, 경내 수행 중인 스님들의 불경 소리가 어우러져 머리가 맑아진다. 그간의 추위는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걸 보니 통도사에도 곧 완연한 봄이 오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