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에 쉬고 있던 눈이 바람 불 때마다 머리 위로 하얀 꽃가루를 흩뿌린다. 지난 한 해 잘해왔으니 올해도 잘살라는 축복 같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에너지를 장전해 줄 여행지를 찾았다면, 양평이 제격이다. 시린 겨울을 견뎌야 푸르른 봄과 뜨거운 여름 을 맞을 수 있는 법! 겨울 한기 속에 빼어난 비경을 뽐내는 양평은 이맘때 유난히 빛난다. “한 껏 달려왔다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일어서라!”라고 청하는 대자연에 지난 회한을 내려놓고 나면, 다시 한 해를 멋지게 시작할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여행
글. 윤진아 사진. 정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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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눈이 내린 다음날 여행에 나서본 사람은 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과 때묻지 않은 자연의 적막이 얼마나 싱그러운지를 말이다.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두물머리에서 한 폭의 그림을 만났다. 눈부신 설경과 시린 강바람이 동시에 마중 나오는 나루터는 며칠 전 내린 눈이 물안개에 둘러싸여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살얼음 틈새로 물비늘이 쨍하게 반짝이고, 얼어붙은 강물 위로 또 다른 시간이 흐른다. 태곳적 신비로움이 박제된 강가를 천천히 거닐고 있자면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 두물머리의 주인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에서 흘러내린 남한강 두 물이 머리를 맞대며 만나는 광경을 오래된
느티나무가 내려다보며 서 있다. 1973년 팔당댐이 생기면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배들이 멈춰 서 있는데, 강물이 멈추니 시간도 멈춘 듯하다. 돛의 색이 누렇다 해 ‘황포돛배’라고도 불리는 돛단배는 한강을 오가며 식량과 땔감을 날랐지만, 지금은 그저 땅 위에 정박해 있는 신세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여행 스폿은 ‘액자 포토존’과 ‘연핫도그’다. 반죽에 연잎이 들어가 빵 속이 연한 초록빛을 띠는 연핫도그는 여행객들이 꼭 사 먹는 간식이 됐다. 액자 포토존은 양평군청 홈페이지에 ‘자연풍경 투과형 액자’로 소개된 프레임 조형물로, 커다란 느티나무와 기나긴 강물은 물론 저 멀리 산까지 배경으로 담을 수
있다.
새하얗게 빛나는 수면 위에 물안개가 두텁게 깔려 있는 것도 보기 드문 장관이다. 어디까지가 강물이고 어디서부터가 안개인지 도통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운데, 대자연이 뒤엉켜 있는 광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물안개 위를 미끄러지던 강바람은 노목에 새하얀 얼음꽃도 피워냈다. 시시각각 움직이는 햇살을 받아 나뭇가지에 매달린
얼음들이 하나하나의 빛으로 되살아나는데, 겨울 진경을 눈앞에서 감상하며 에너지를 채우기에 충분하다.
곰삭은 낙엽 위로 추억이 겹겹이 쌓이고, 주름 깊은 은행나무엔 겨울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았다. 엔진이 식은 기관차와 객차마다 지난한 세월이 묻어난다.
‘폐역’이라는 명패를 달고 황량한 겨울 벌판에 선 구둔역은 1940년 중앙선의 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를 모두 지켜보며 질곡의 세월을 버텨온 간이역은 청량리-원주 간 중앙선 복선화 사업으로 2012년 폐역의 수순을 밟았다.
역사는 아담하다. 문과 천장이 나무로 만들어져 삐걱거리는 대합실에는 옛 시간표와 요금표가 빛바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승강장으로 나가면 겨울 햇살을 머금은 이정표가 철로를 지키고 서 있다. 멈춰 선 기관차와 객차도 덩그러니 서서 폐역의 쓸쓸한 정취를 더한다.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은 쓸지 않은 낙엽이
남아있어 밟는 느낌이 좋다.
기관차 엔진은 식었지만, 사라질 뻔했던 구둔역은 새로운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목조양식의 구둔역은 역사와 광장, 철로, 승강장까지 등록문화재 296호로 지정됐다. 아픈 과거를 뒤로하고 폐역은 이제 첫사랑의 성지로 변모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의 기찻길 데이트 장면이 인기를 끌며
조명받았고,
이후에도 가수 아이유의 앨범 재킷과 BTS의 뮤직비디오에 구둔역이 등장했다. 성실한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다시금 새 역사를 여는 2024년 1월. 단절된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가는 기찻길이 여행자의 새로운 출발을 뜨겁게 응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