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나도 버릴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이 있나요?’라는 주제로 글 공모전을 시행했습니다.
한국문인협회 보령지부의 심사 결과 우수작 2편이 선정되었습니다.
경영관리처 총무부 이관범 사원
남자가 가장 효자가 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아는가? 바로 훈련소 생활을 할 때이다. 집안 말썽쟁이, 골칫덩어리도 6주 동안의 훈련소 생활동안 부모님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 앞으로는 집에 효도만 하겠다 다짐한다. 이러한 훈련소 생활 속에서도 모두가 눈물바다가 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편지를 받는 순간이다. 나 또한 할머니의 편지를 받아 한 줄을 채 읽기 전에 울고 말았다.
우리 부모님은 23살 한참 청춘일 나이에 나와 마주하였다. ‘잘 살기 위해’가 아닌 ‘살기 위해’ 늘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셨다. 하지만 집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아 부모님은 타지로 떠나셨고 나는 10살이 되던 해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됐다.
할머니는 강하신 분이었다. 전라도의 한 외진 섬에서 장녀로 태어나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일을 하셨다. 아버지가 20살이 되시던 해 할아버지를 떠나보내셨고, 지금까지 바느질로 한 가정을 지켰다. 손에 박혀 하나의 마디가 되어버린 굳은살과 실타래에 꽂힌 수많은 바늘은 할머니의 지난 인생이 절대 부드럽고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세상의 차가운 바람은 그녀의 얼굴을 패어 주름을 만들었지만 어린 손자에겐 따스한 품을 내어주셨다. 어린 손자는 가난, 애정의 결핍을 모른 채 건강하게 자랐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할머니는 지역 어르신 한글 대학에서 한글을 배우셨다. 사실 할머니가 한글을 모르시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누구보다 말을 잘하셨고 다른 친구분들끼리 계를 하실 때 계장을 하셨을 정도로 똑똑하셨으니까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내가 한글 배우는 게 재밌냐 물어보자 60대의 그녀는 해맑은 아이의 웃음을 지으셨다. 본인의 이름 옆에 손자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 등 가족의 이름을 한 장, 두 장 수없이 쓰셨고 나중엔 문장으로도 만드셨다. 할머니는 이후 아무런 문제없이 한글 대학을 무사히 마치셨다.
후에 어린 손자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 훈련소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시며 그렇게 강해 보이던 할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 물론 훈련소 생활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가족, 친구들과 떨어져 훈련소 안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훈련하고, 혼나고, 자는 것은 너무나 생소했다. 고향도 논산이었기에 밖으로 행군할 때 시내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라도 하면 그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어느 날, 할머니의 손편지를 받았다.
“관범아 잘인니? 할머니는 손자가 보고시푸다.”
남들이 봤을 때 맞춤법도 틀리고 글씨도 삐뚤삐뚤해 초등학생이 쓴 편지 같았다. 하지만 내게 할머니가 쓴 편지는 너무나 남달랐다. 뒤늦은 나이에 글을 배우며 얼마나 힘드셨을까? 손자에게 편지 한 장을 쓰기 위하여 얼마나 고민했는지 단어마다 지운 흔적이 보였다. 그녀가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글을 나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로 조금씩 읽어내려갔다. 손자의 훈련소 생활은 할머니의 사랑 덕분에 건강하게 잘 마칠 수 있었다.
할머니의 손편지는 내 방 책상 서랍 안에 잘 모셔져 있다. 이따금 힘들 때 한 번씩 들춰보며 그때를 회상한다. 요즈음 할머니는 언제 휴대폰 문자쓰는 법을 배우셨는지 종종 나에게 문자로 연락하시는데 여전히 완벽하지 않은 맞춤법으로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내신다.
하얀 편지지 위, 그녀가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써 내려간 마음은 평생 간직하고 싶다.
나 또한 주변 소중한 사람들에게 진실하고 따뜻한 마음으로써 평생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김에 다들 소중한 사람들에게 따스함을 담은 편지 한 장 쓰는 것을 권하고 싶다.
한국문인협회 보령지부 심사평
좋은 수필이란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는 글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손편지 한 장>은 따뜻하고 감동적인 글이었습니다. 문맹인 할머니와 외로웠던 손자의 소중한 추억. 삐뚤고 철자가 다 틀리지만 어렵게 써 보낸 할머니의 손편지는 군대에 있는 손자를 결국 울게 만들었지요.
발전환경처 발전운영실 김현표 실장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숫자와 인연을 맺는다. 주민등록번호, 학번, 군번, 사번, 전화번호 등 나를 상징하고 나타내는 번호들이다. 30년이 넘게 지나도 아직 기억하고 있는 번호들이다. 대부분 군중 속 개인을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부여받은 숫자지만 전화번호는 좀 특별하다. 가족, 친구 넓게는 사회와 나를 연결시켜주는 소중한 연결고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시대인 요즘은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 없지만 예전에는 가족이나 친구 전화번호 10개쯤은 기억하고 다녀야 했다. 그래서 외우기 쉬운 번호를 선호했고 나름 암기방법을 만들기도 했다.
초등학교 언제쯤 시골집에 처음 전화를 들였는데 당시 체신국에 다니시던 이모부가 아버지께 핀잔을 하셨다. 좋은 번호를 받도록 해줄 수 있었는데 연락도 없이 전화를 설치했다는 것이었다. 아쉬운 부탁을 못하시던 아버지는 창구 직원을 통해 접수를 하셨기 때문이다.
번호를 바꾸라는 이모부의 반복된 요구에도 아버지는 처음 받은 전화번호를 고수하셨다. ‘5092’라는 번호가 마음에 드셨는지 요즘 말하는 청렴 때문인지 아니면 자존심인지 알 수 없다.
나는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이 전화번호를 주입시키기 위해 손오공을 이용했다. 천도복숭아를 몰래 먹은 손오공이 벌로 기름 솥에 들어가 구이가 되었는데 ‘손오공구이’가 되었다. 유치하지만 전화번호를 주입시키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러다 서울에 올라와 어느 어묵가게 앞 나부끼는 깃발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었다. 깃발에 전화번호가 적혔는데 오뎅구이 ‘5092’였다. “이렇게 심오한 뜻이!” 감탄을 하면서 객지에서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 한참을 서 있었다.
작년 이맘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집안 물건 정리를 하던 중 쓰레기 더미에서 얼룩진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무심코 열어보니 시골집에 처음 설치했던 빨강색 다이얼 전화기였다. 투명하고 둥그런 다이얼 판 아래에 플라스틱 테이프가 붙었는데 타자기 흰색 글씨로 5092 전화번호가 선명하게 찍힌 옛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엔 검은색 투박한 전화기가 일반적이었는데 정사각형에 낮은 빨강색 전화기였다.
버튼식 전화기가 나오면서 아랫방 다락에 보관되고 있다가 골동품이 되어 수십 년 만에 눈앞에 나타났다. 소중한 물건이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어릴 적 가족들의 손때가 묻은 첫 전화기, 여러 물건 중 유일하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형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기를 가져왔다.
분가 이후 번호를 바꾼 형제들과 달리 나는 이제껏 5092를 전화번호로 사용하고 있다. 장남은 아니지만 아버지 전화번호를 계승했다는 뿌듯함도 있고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연대와 고향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번호다. 오래된 빨강색 전화기는 내 전화번호의 뿌리이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징표로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다.
퇴근 후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건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기계음을 들으면 허전하면서도 아버지 전화번호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누군가 받는다면 더는 전화를 걸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전화를 자주 드리지 못해 후회가 된다.
한국문인협회 보령지부 심사평
<아버지 전화번호>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쓰시던 손때 묻은 빨간 전화기를 버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간직하는 아들의 마음이 심사위원의 마음 자락을 붙잡았습니다. ‘5092’라는 전화번호를 오래도록 소중히 아끼며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모습이 애잔하게 녹아 있어서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