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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이파리도 새해를 맞는구나
봉황산 메아리

봉황산 메아리 당선작

7월 10일부터 31까지 22일간 봉황산 메아리 글 공모전을 시행했습니다.
한국문인협회 보령지부의 심사 결과 우수작 2편이 선정되었습니다.

지우개

보령발전본부 연료설비부 김남국 사원

봉황산 메아리 02

어느새 해가 일과를 마치고 서쪽 산 너머로 들어가서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나도 어제와 같지만 오늘은 다른 퇴근 준비를 마치고 나 홀로 집을 향하였다. 퇴근하는 길 양옆에는 스펀지처럼 생긴 시커먼 한 돌들이 서로 뭉쳐 담을 이루고 있었고 주위에는 풀벌레 소리만 들려왔다. 그 소리는 일정하지만 조금씩 다르게 울려 퍼져서 퇴근하고 있는 나를 위한 축가 같았다. 풀벌레도 나의 퇴근을 축하해준다는 느낌이 신선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어느덧 걷다보니 길의 마지막에 이르렀고 풀벌레의 축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 길에 나만 있다는 사실과 정말 엉뚱하게도 기억하고 싶지 않고 나에게 잠시 잊고 있었던 그가 떠올랐다.

그는 나의 인생에서 1번이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 어떤 상황, 무슨 일이 있든 그를 우선순위로 놓고 생각하였다. 그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을 같이 먹었고 고민이 있다면 같이 듣고 슬퍼했었다. 물론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가 보고싶다면 언제나 내게 와주었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항상 옆에 있어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였고 서로의 행복이었다.

서로에게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샌가 그는 나를 위한 거짓말을 조금씩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짓말의 이유는 나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좋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도 그와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처음에는 별로 의식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는 그 거짓말이 배려가 아닌 기만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결국 선의의 거짓말은 독이 되어 서로를 병들게 만들었다.

점차 서로의 인생에 첫 번째였던 사람을 후 순위로 미루었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같이 있는 시간보다는 각자 있는 시간이 편하였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헤어지고 난 후 상대방의 거짓말로 인한 불신과 고통이 사라져 머리로는 이별이란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후회와 아픔 이라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고 나로서는 그것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 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껍데기였고 술과 눈물을 친구로 삼아 시간을 보냈었다. 겨우 지난주부터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퇴근길에 그를 떠올리게 되니 다시 한번 감정과 고통이 머릿속에 요동쳤다. 더 이상 걷기가 힘들어 주위에 있던 돌 위에 걸터앉았다.

그 순간 엉덩이에 뭔가 깔린 느낌이 들어 손으로 확인을 해보았다. 껍질에 쌓인 조그마한 지우개였다. 겉을 감싼 종이에는

① 원하는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② 지우고자 하는 기억을 떠올리신 다음에 지우개로 지우시면 됩니다.
③ 지운 기억은 복구가 안 되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간단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너무 장난스러운 문구의 지우개였지만 진짜라면 나에게 고통을 없앨 수 있는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지우개를 손에 들고 한번 시험해보자는 마음으로 어렸을 적 창피한 기억을 떠올렸다.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과자 한 봉지를 훔쳤던 기억이고 아직도 나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지우개를 집고 그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 순간 눈앞에 30cm 정도 앞에 해당 기억이 동영상처럼 재생이 되었다. 순간 이질적인 상황에 놀라서 영상만 멍하니 쳐다보았는데 그 당시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의 영상이었다.

종이에 적힌 대로 지우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것을 서서히 지우니 영상이 점점 희미해져 결국에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 뒤에는 내가 ‘무엇을 지웠다’라는 기억과 후련하다는 감정만이 남겨져 있었다.

아까 읽은 것처럼 이 지우개는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지우고 싶었고 지울 것은 그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었다. 그와 첫 만남, 미소, 함께 보낸 추억 그리고 이별까지 지우고 싶었다.

나는 이제는 편해지고 싶었다. 그 기억을 지우면 다시는 그를 떠올리며 고통을 느끼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와 함께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한 모든 것이 눈앞에 영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행복했던 첫 만남부터 너무나도 힘들었던 이별까지 눈앞에 보였고 동시에 그때의 감정이 다시 나에게 떠올랐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 지우개를 들었지만 흐르는 눈물로 인해 영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멈추려 하였지만 멈출 수 없고 지우개를 놓아버린 채 그 자리에 머리를 숙여 울었다. 그와의 기억은 나에게 아픔이었지만 동시에 나의 기쁨이자 힘든 나에게 위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한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대신 다른 기억을 지워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기억은 맨 처음 퇴근을 하고 지우개를 주운 기억이었다. 지우개를 주운 내 모습이 영상으로 떠올랐고 지우개로 지웠다. 그러니 지우개로 어떤 기억을 지웠다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또 지웠다. 그것을 지웠다는 기억이 또 생겼다. 또 지웠다.

결국에는 지우개는 사라지고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지 기억이 비어 있었다. 주위에는 풀벌레 소리만 가득했다.

한국문인협회 보령지부 심사평
<지우개>는 글 구성과 소재, 제목에 맞는 일관된 글의 전개가 좋았고 작가의 삶과 연결된 아픔, 우정, 가족사 등 살아온 것들을 ‘지우개로 지운 기억은 한번 지우면 복구가 안됩니다’라는 이런 구성과 전개에 심사위원 3명이 만장일치로 최우수작으로 뽑았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은 지우개로 지운 삶의 빈 공간이 생긴 것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작가의 의도가 나타나지 않은 결론 부분이 좀 미숙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파리도 새해를 맞는구나

세종발전본부 경영기획부 김민석 인턴

봉황산 메아리 03

이파리도 새해를 맞는구나
겨울이 되면 추락하는 낡은 이파리라고
누가 그러더냐
진리는 믿음의 문제였다
해서 위태롭다 동정하지 마라
괴로움이 깊을수록 사랑 또한 깊으리라
아무래도 삶은 나를 속이지 않았나 보다
정직하게 나를 떠밀며
자기의 변화를 완성시키는 거 보니
너는 환상 속에 존재하지 않은
먼 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꽃이 피고 지며 추락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라도
사라짐으로서 구원은 추억이기에
불변은 존재한다
고로 사랑은 영원하며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 그렇다
나의 극한은 나의 숨결이기에
이대로 한 평생 앓고 싶구나

한국문인협회 보령지부 심사평
<이파리도 새해를 맞는구나>는 제목의 독창성과 소재의 참신성이 느껴졌습니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시들어가는 아픈 이파리에 비유하는 작가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어 글 구성과 내용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와 높은 점수를 주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