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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 전성시대
문화 트렌드

‘부캐’ 전성시대

개그맨 김신영은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에 촌스러운 옷차림과 맛깔나는 트로트 실력을 더한 빠른 1945년생 둘째이모 ‘김다비’로 대활약 중이다.
이효리는 제주와 서울에 있는 자신을 각각 ‘제주댁’, ‘린다G’라고 부른다. 우리 삶도 비슷하다. 현실의 나와 ‘SNS상의 나’는 사뭇 다르지 않던가. 누구나 ‘부캐’를 갖고 살아가는 멀티 페르소나 현상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글 아이콘글. 강진우 문화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아이콘일러스트. 박수정
문화 트렌드 02

‘부캐’로 선보이는 색다른 모습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를 통해 인기를 끌고 있는 90년대풍 혼성그룹 ‘싹쓰리’의 주인공은 유재석·이효리·비가 아니다. 조금 모자라지만 뭐든 열심히 하는 맏형 ‘유두래곤’, LA에서 프랜차이즈 미용실 대표로 자수성가한 재미교포 ‘린다G’, 항상 섭섭하지만 흥 많고 긍정적인 막내 ‘비룡’이 팀을 이끌어 간다. 유명 연예인 세 사람의 ‘부캐(부캐릭터)’가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춘다.

개그맨 김신영은 ‘둘째이모 김다비’라는 부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김신영의 둘째이모 콘셉트로, 오리백숙집을 운영하다가 주체할 수 없는 끼와 재주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빠른 1945년생에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흔히 말하는 ‘아줌마 패션’을 즐긴다. “나의 매력 포인트는 치아에 묻어있는 빨간 루즈”라고 농담할 정도로 강력하고 친근한 입담을 자랑한다. 트로트 곡 <주라주라>로 인기차트를 점령하기도 했으며, 공익광고는 물론 화장품·햄버거 모델로 발탁되며 김신영과는 또 다른 웃음과 매력을 선사하고 있다. 유튜브에서 부캐로 활동하며 기사회생한 연예인도 있다. 개그맨 안일권은 ‘연예인 싸움 1위’이지만 막상 다른 연예인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영상을 여럿 올리며 누리꾼들의 사랑을 받았다. 개그맨 추대엽은 출연하던 개그 프로그램 폐지로 서서히 잊히다가 기성 노래를 비슷하면서도 유쾌하게 리메이크하는 부캐 ‘카피추’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부캐는 유명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도 누구나 부캐 한둘쯤은 갖고 있다. 직장에서의 나와 퇴근 이후의 내가 다르고,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며, 현실의 모습과 SNS상의 모습이 다르다. SNS에 여러 계정을 만들고, 각 계정에 일상·취미생활·특기 등을 나눠서 올리기도 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나의 여러 단면들을 잘게 쪼개는 것일까.

부캐보다 중요한 ‘본캐’

저명한 트렌드 연구가인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이러한 경향성을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라는 말로 정의한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는데, 20세기 초의 대표적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에 의해 ‘상황에 따라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이라는 의미로 다시 태어났다.

원래 인간에게는 상황에 따라 달리 쓰는 여러 가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융이 말하는 페르소나와 오늘날 유행하는 부캐는 결이 다르다. 전자가 나의 주된 본모습을 가운데 두고 여러 가지 가면을 곁가지로 바꿔 쓰는 것과 달리, 부캐는 본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나’다. 유재석과 유산슬의 활동 영역이 전혀 다르다는 점과, 유재석이 받지 못한 예능 신인상을 유산슬이 받았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세상도 두 인물의 정체성이 분리돼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김난도 교수는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20』을 통해 ‘멀티 페르소나가 성행하는 이유는 개개인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잣대였던 혈통과 직업의 가치가 약화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개인주의가 널리 퍼지고 평생 직업의 기반이 흔들리면서, 혈통과 직업을 기반으로 삼고 있던 하나의 단단한 정체성도 여러 조각으로 나뉘게 됐다는 것이다. 더불어 인터넷과 SNS의 등장으로 자신의 여러 모습을 보다 쉽게 선별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됐고, 이에 따라 사람들도 각각의 정체성이 뚜렷한 여러 가면을 갖게 됐다는 게 김 교수의 분석이다. 방송가가 부캐를 유행시킨 게 아니라, 부캐의 시대적 유행에 방송가가 숟가락을 얹은 셈이다.

부캐 열풍은 한 사람의 모습과 역량을 다양하게 선보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개개인의 정신적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캐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나의 ‘본캐(본캐릭터)’를 찾고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점을 명심하고 실천한다면, 세상은 다채로운 부캐로 더욱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