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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에 담긴 <br>질병과 가난의 역사
퇴근길 인문학

우리말 속에 담긴 질병과 가난의 역사

말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닌다. 세월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 흐려졌을지 몰라도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말에는 숨겨진 뜻이 담겨있다. 가난과 질병이 만들어낸 말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글 아이콘 글. 박건호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 저자 사진 아이콘 사진제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퇴근길 인문학 02 일제 강점기였던 1920년 인천의 한 동네에서 위생경찰과 한 조를 이룬 의사들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콜레라 예방 접종을 하고 있다. 퇴근길 인문학 03 한국전쟁 당시 개성지역에서 피란민들에게 배급되는 지원품을 받으러 몰려든 아비규환의 한 장면. ‘개판 5분 전’은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말에 흔적을 남긴 전염병

우리 역사는 오랫동안 전쟁, 가난, 전염병 등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였다. 이런 가혹한 역사가 우리 말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리 없다. 일상적인 삶이 멈춰버린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전염병이나 가난이 우리 말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이후 시대가 변화와 함께 지금은 어떻게 다르게 쓰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로 불린 콜레라가 우리 말에 남긴 흔적들이 눈에 띈다. ‘쥐 나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갑자기 다리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쥐가 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스러운 다리의 경련 현상을 왜 하필 ‘쥐 나다’라고 표현했을까? 콜레라는 다른 말로 쥣통(痛)이라고도 불렸다. 이 병에 걸리면 쥐 같은 것이 사지(四肢)로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 같으며, 운신도 마음대로 못하고 뼈만 남아 죽기 때문에 쥣통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콜레라를 막기 위한 주술의식으로 고양이 그림을 대문에 붙이기도 했다. 콜레라에 걸리게 하는 악귀를 쥐 귀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천적인 고양이 그림을 붙여 쫓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면 ‘쥐가 발을 물어 근육에 쥐가 오르는 것’같다고 간주하고 콜레라에 걸리지 않았는지 의심했던 것이다.

가난을 뜻하는 말들의 숨겨진 속뜻

콜레라 같은 질병뿐 아니라 가난과 굶주림도 우리 말에 큰 흔적을 남겼다. ‘개판이다’ 혹은 ‘개판 5분 전’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리에 어긋나거나 질서가 없는 판국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사람들은 개판의 ‘개’를 ‘개(犬)’로 해석해 마치 개 여러 마리가 음식을 차지하려고 다투거나 아니면 노느라고 난장판을 벌인 장면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 말도 원래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여기에도 한국전쟁기 가난과 아픈 역사가 담겨있다. 전쟁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피란 생활로 밥을 먹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 때문에 피란민 수용소 같은 곳에서는 이 피란민들을 위해 거대한 솥에다 밥을 지어 제공했는데 밥을 나눠주기 전에 사람들에게 크게 소리치는 말이 있었다. 그게 바로 “개판 오 분 전!”이다. 즉 밥이 거의 다 되었고 이제 솥뚜껑을 5분 후에 열겠으니 준비하라는 뜻이다. 바로 ‘개판’의 ‘판’은 나무로 만든 솥뚜껑이었던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계속해서 걸어서 굉장히 굶주린 상태의 피란민들은 이 소리를 들으면 누구랄 것 없이 배식받기 위해 몰려들어 밥솥 주변이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생긴 ‘개판 5분 전’은 이후 ‘5분 전’이라는 말이 생략된 채 쓰이게 되고, 세월도 흘러 전쟁의 시간도 먼 과거지사가 되어 버리면서 그 정확한 의미 파악이 어렵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처음 ‘개판’이란 말을 듣는 사람이 ‘개(犬)’를 연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 거기서 솥뚜껑을 연상한다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게 돼 버렸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