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를 사랑한 중부가족
악보를 볼 때는 음표와 음표 사이에 실린 작곡가의 영혼까지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악기를 손에 쥔 고영곤·남상선 과장이 음유시인으로 변신하는 이유다.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경건한 자세로 악기를 품은 이들은 좀 전의 직장인이 아니다. 반복되는 연습 탓에 손에 굳은살이 생겨도 연주할 때만큼은 신이 난다. 내 몸이 리듬과 파동에 따라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악기를 알기 전의 ‘조신한 직장인’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느덧 가장 친한 친구가 된 악기와 함께 낭만적인 연주자로 변신한 중부인들의 깊고도 그윽한 이중생활.
클라리넷을 손에 든 고영곤 과장의 표정을 본 사람은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가 정말 행복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일상에 쉼표가 필요할 때, 고영곤 과장은 주저 없이 악기를 연주한다. 바이올린, 첼로, 색소폰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악기는 바로 클라리넷이다. 아랫입술만 사용해서 부는 클라리넷은 대표적인 목관악기로,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변화무쌍한 음색이 매력으로 꼽힌다.
클라리넷을 처음 손에 쥔 건 5년 전이다. “악기를 연주하고 싶다는 마음이야 늘 있었지만, 용기가 부족해 듣는 걸로만 만족해왔죠. 사실 그동안 저 자신을 위해서는 시간을 써본 적이 없었어요. 더는 망설이지 말자는 생각에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한계는 연습량으로 극복해나갔다. 전문 음악인들과 함께 연주하며 배울 점이 있으면 습득했고, 음악적 깊이를 더하고자 시립합창단에도 입단했다. 우아하고 중후하며 때로는 농염한 매력을 지닌 클라리넷 덕분에 두고두고 위안이 되어줄 추억도 많이 생겼다.
타지역에서 초청 연주회를 할 때의 일이다. “주최 측에서 요청한 잔잔한 곡을 연주하던 중, 잠깐 연주가 비는 사이에 관객 한 명이 ‘잘 알려진 신나는 노래’를 신청곡으로 부탁했어요. 준비해온 악보도 없고 갑작스러운 요청이라 난감했는데, 제가 평소 연습용으로 갖고 다니던 캐럴 악보가 떠올랐죠.”
10월 초순에 울려 퍼진 캐럴연주곡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모든 관객을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공연이 끝난 후, 곡을 신청했던 관객이 따로 찾아와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을 선물받았다”며 두 손 꼭 잡고 건넨 감사인사도 생생하다.
“앙상블팀 멤버들과 호흡을 맞추게 되면서 관객과의 교감도 깊어졌고, 공연도 더 재밌어졌어요. 누군가와 음악을 매개로 영감을 주고받는다는 게 참 멋진 일인 것 같아요. 결국 음악은 귀로, 마음으로 듣는 거잖아요. 세상에 거창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우리의 우정, 꿈, 고민을 아름다운 선율에 담아 들려드리고, 사람들도 그 평범한 이야기에 공감해주면 좋겠어요.”
고영곤 과장은 원곡의 느낌을 최대한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수없이 듣고, 작곡가의 의도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빼곡히 들어찬 일정 사이 연습을 거듭한다는 게 버거울 법도 하건만, 고영곤 과장은 서슴없이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중년의 나이를 무색하게 만든 클라리넷은 생의 한가운데에 도달한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클라리넷을 연주할 때면 그동안 살아온 인생과 겪어온 감정들이 음으로 표현되는 것 같아요. 바쁜 만큼 행복했던 지난 5년을 돌아보면, 악기를 배우기로 한 건 제가 살면서 내린 결정 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일할 때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자투리 시간을 잘 만 모아 활용하면 충분히 인생을 즐길 수 있더라고요.”
클라리넷은 소리 자체가 따뜻하고 다른 악기와의 하모니가 뛰어나 재즈나 탱고 같은 장르와도 썩 잘 어울린다. 고요한 연습실에서 한 음 한 음 찾아가다 보면 뭉클한 순간이 찾아온다. 중년의 나이에 클라리넷을 만난 고영곤 과장은 5년간 공들인 시간만큼 이제는 제법 농염한 선율을 만들어낼 줄 아는 클라리네티스트가 됐다.
‘생각으로 끝나면 꿈이고, 실천하면 현실’이라는 말은 고영곤 과장의 캐치프레이즈나 다름없다.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고, 미력하나마 남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악기 연주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할 듯하다. 앞만 보고 달려갈 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꿈들을 소중하게 보듬으며, 고영곤 과장의 유쾌한 합주는 이제 한창 클라이맥스를 향해 진행 중이다.
고영곤 과장의 ‘최애’ 연주곡
영화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네 삶이 꼭 거대한 오케스트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금관악기 연주자들은 오케스트라의 맨 뒤에 있다. 웅장한 관현악 사운드를 완성하는 트롬본은 독주보다는 다른 악기들의 멜로디를 든든한 화음으로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남상선 과장도 트롬본과 많이 닮았다. 악기 연주와 합주를 통해 매너와 존중, 절제를 배웠다는 남 과장은 “트롬본과 함께 다소 갇혀 있던 삶의 반경이 부쩍 넓어졌다”고 귀띔했다.
음악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남상선 과장이 트럼보니스트가 된 건 우연히 지인의 기타 연주를 듣고 나서다. 운명처럼 마음을 빼앗겼던 기타를 시작으로 피아노, 전자 키보드, 플루트도 다룰 줄 알게 됐다. 소문난 연습벌레인 남상선 과장은 독학으로 트롬본을 마스터했다. 다행인 것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발전운영실 정예요원의 섬세한 손이 오선지 속 음표들의 조화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는 것이다.
트롬본을 향한 남상선 과장의 애정은 각별하다. “제 악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 트롬본이라는 악기가 얼마나 기특한 녀석인지 몰라요. 트롬본은 오케스트라의 뼈대와 같아요.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다른 악기를 받쳐주는 깊고 그윽한 중저음으로 오케스트라의 틀을 잡아주지요. 트롬본 소리가 약하면 다른 악기들이 제소리를 못 내는 것도, 다 기초가 튼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상선 과장은 현재 여러 앙상블팀에 소속돼 다양한 버스킹 공연과 연주회에서 청중과 만나고 있다. 2년 전 이맘때 보령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두드림 나눔 콘서트’ 무대에도 섰다.
“록밴드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를 연주하던 중, 기존 곡과 전혀 다르게 트롬본 음색을 선보였더니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며 열광하더군요. 급기야 어떤 관객은 조용한 간주 부분에서 정적을 깨고 ‘트롬본 진짜 멋지다!’라고 외쳤는데, 쑥스러우면서도 짜릿했어요.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음악으로 교감하며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트롬본을 연주하게 되면서 많은 추억이 생겼어요. 더 많은 사람이 트롬본의 매력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부터 트롬본은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드는 악기였다. 그래서일까. 녀석과 더불어 인생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트롬본 덕분에 따분하던 인생이 너무 재미있어졌어요. 악기는 내 삶을 풍성하게 하고, 지쳐 있을 때 나를 다독여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죠. 모든 물건이 다 그렇지만 특히 악기는 주인이 아껴주는 만큼의 소리로 보답하는 법이라는데, 앞으로도 변함없이 애정을 쏟아 평생 취미이자 베스트프렌드로 쭉 가고 싶네요.”
혼자서는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고 부족했던 소리가 멤버들과의 합주를 통해 비로소 온전한 음악으로 완성될 때의 짜릿함이란! 직장인이자 연주자로서의 삶은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잘 어울렸다. 재밌으니까 신나서 연주했고,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일하는 지금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목표요? 음~ 스스로 행복한 연주자가 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행복해야 그 에너지로 관객 앞에 서고, 행복한 기운을 전달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사회의 삭막함에 클래식 악기로 대변되는 아날로그 감성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모쪼록 우리 주변에 악기 연주를 즐기는 사람이 더 많아져서, 잊고 살던 순수한 감성을 되살리고 그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아름다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음악 이야기엔 누구보다도 진중했던 남상선 과장은 인터뷰 내내 주위 사람들을 웃게 했고, 에너지를 나눠줬다. 함께하는 음악의 힘을 믿으며 무대 안팎에서 신명나게 연주하는 그의 희망가(希望歌)를, 한국중부발전 임직원들도 기쁘게 들어주었으면 한다.
남상선 과장의 ‘최애’ 연주곡
영화 <슈퍼맨> OST Main Theme
어린 시절 재미있게 봤던 영화 <슈퍼맨>에서 웅장한 중저음으로 극의 긴장감을 연출한 악기가 바로 트롬본입니다. 영화음악의 거장 존 윌리엄스가 제작한 곡으로, 트롬본만의 묵직한 사운드가 다른 악기들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