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에서 가장 핫한 동네로 떠오른 해방촌은 언덕이 가팔라서 땀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느긋하게 오르다 보면 망원렌즈로도 안 잡히는 감성이 시야를 꽉 채운다. 이상하게 느긋하고 지루할 틈이 없는 남산 아래 첫 동네, 해방촌. 이 여름, 빠른 속도전에 지쳤다면 해방촌 골목에서 헤매보자. 길 잃는 재미가 이 동네의 매력이니까.
세상에, 여행
글. 윤진아 사진. 정우철
해방촌은 1945년 해방과 함께 형성된 마을이다. 해방 후 귀국한 동포와 실향민, 피난민 등 정처 없는 사람들이 남산 기슭에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행정구역상으론 서울 용산구 용산2가동
일대를 지칭한다. 골목
구석구석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108계단을 통해 마을에 들어가는 게 좋다. 하늘로 향하듯 높고 가팔라 ‘하늘계단’이라고도 불린다. 계단 아래서 올려다보면 홍콩의 어느 주택가 같기도
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서울
풍경이 옛날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해방촌에는 반듯한 길이 없다. 하나같이 구불구불 접혀있고, 골목을 지날 때마다 경계선을 넘는 듯 분위기가 바뀐다. 과일가게와 양장점, 곱창집, 슈퍼마켓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가 하면,
어르신들 틈에서 마티니를 마시고
있는 청춘들, 반찬가게 옆에 열린 팝업스토어 등등 전통과 요즘이 이질감 없이 스며들어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인 만큼, 발길 닿는 곳마다 이국적인 정취도 느낄 수 있다.
태국인 셰프가 운영하는 쌀국수
맛집을 필두로 현지 맛을 제대로 구현한 각국 전통음식은 미식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이 복잡하고 독특한 골목의 중심에 신흥시장이 있다. 언덕 위까지 사람들을 불러 모은 일등공신으로, 50년 된 백반집부터 수제 디저트 가게까지 여행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시장 안에는 레트로 감성
오락실도 있고,
추억을 담을 사진관도 생겼다. 작은 시장이라 금방 한 바퀴를 돌 수 있지만, 세월의 흔적이 쌓인 노포들과 트렌디한 카페가 나란히 자리한 풍경에 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
남산 뷰 테이블에 앉아 미래로 편지를 쓰는 콘셉트의 카페는 특히 외국인 여행객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낡은 단독주택을 개조한 카페로, 다락방처럼 좁은 계단을 따라 이어지는 루프톱은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탁
트인 풍경을 자랑한다. 해방촌에선 어디서든 고개를 들면 남산타워가 보인다. 높은 지대에 있는 좁다란 골목을 돌아다니기란 쉽지 않지만, 내 취향에 꼭 맞는 감성을 발견하는 기쁨이 고단함을 잊게
해준다.
10여 년 전부터 특색 있는 편집숍과 공방이 하나둘 들어선 해방촌은 지금 문화공간 천지다. 경사진 언덕에 자리한 동네책방들은 ‘나와 닮은 취향을 발견하는 안내소’ 같은 곳이다. 손바닥 크기의
그림책부터 삐뚤빼뚤
손글씨로 채운 표지까지, 개성 있는 독립출판물을 들춰보다 보면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라는 다정한 응원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니, 여행의 끝자락엔 독립서점에 들러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골라
몇 페이지 넘겨보다
가도 좋겠다. 작은 골목 한구석에서 찾아낸 낭만이 어쩌면 남산타워 꼭대기보다 높이 채워질 테니 말이다.
사무·토목·건축 직군으로 나뉘어 바쁘게 일하던 신보령발전본부 40기 24사번 동기들이 일상을 벗어나 새 추억을 쌓았다. 매주 주말이 지나면 ‘이번엔 어디 갔다 왔는지’, ‘어떤 맛집을 정복했는지’ 속속들이 공유해온 이들에게 해방촌 탐방은 놓칠 수 없는 미션이었다고. 서로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을 골라주고, 서로의 취향을 알아갔던 세 친구의 여행을 카메라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