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걸을수록 그 매력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언제부터였을까. 조그마한 골목 그리고 잊혀져가는 동네에 불과했던 이곳에 다시 사람들의 걸음이 닿기 시작한 게 말이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100세는 훌쩍 뛰어넘은 대전 소제동의 시간은 거꾸로 흘러간다. 오밀조밀 연결되는 소제동 골목길에서 그 시간을 함께 했다.
접근성이 좋아 하루에도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대전역. 대전역에서 걸어서 5분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소제동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원래 대전역 앞으로 자리한 은행동이 대전에서 가장 번화한 상권이었지만, 몇 해 전부터 사람들은 소제동의 매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역사보다는 ‘뉴트로’한 감성 때문에 소제동을 찾을 테지만, 동네가 간직한 이야기를 알고 하는 여행은 또 다른 재미를 주는 법. 소제동이 간직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소제호라는 큰 호수의 이름에서 유래된, 소제동은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의 개발과 함께 철도 종사자들의 관사가 생겨나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마을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은 소제동과 철도관사촌은 이 지역 사람들과 1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함께해왔다. 지금도 1920~1980년대의 흔적이 남아있어 소제동 골목길은 그 시절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철도관사촌 중 30여 채 이상의 철도관사가 밀집된 유일한 지역 소제동. 특히 소제동의 골목길은 사람의 지문처럼, 다른 장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골목의 패턴을 가지고 있어 역사·문화적 가치가 남다르다고. 하지만 대전의 산 역사와도 같은 소제동도 무분별한 개발과 무관심 속에서 사라질 뻔한 위기에 처하고 만다.
이에 한 스타트업이 소제동을 위해 나섰다.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서울 익선동 거리를 탄생시킨 익선다다가 그 주인공. 익선다다의 박한아 대표는 서울 익선동 거리를 성공한 경험을 대전 소제동에 심었다. 이름하여 소제호 프로젝트. 박한아 대표는 ‘소제호’라는 스타트업을 창업해 철도관사촌 지역의 낡은 관사주택들을 사들였고, 레트로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맛집과 카페 골목으로 변신시켰다. ‘소제동 관사촌을 10년 이상 지속가능한 핫플레이스로 만들고 싶다’던 소제호의 바람이 조금씩 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제호 프로젝트는 현재진행형이다. 소제동의 역사, 남겨진 것들과 지켜 나갈 것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수집해 역사적 장소로서의 소제동의 가치를 놓치지 않았다.
골목길 마다 자리한 SNS에서 이름 좀 났다는 가게들 입구에 붙은 ‘소제동 아트벨트’라는 아크릴 현판이 그 증거인 셈. “대전 동구에 위치한 소제동 철도관사촌은 1920년대 소제호라는 큰 호수를 매립하여 그 위에 형성되었으며, 전국에 남아있는 철도관사촌 중 건축 및 공간적 특징이 가장 잘 남아있어 대전의 근대 역사와 생활문화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공간에 이 문구가 걸린 현판을 걸어놓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이곳이 어떤 공간이며, 어떤 역사를 품고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게 해준다.
치앙마이방콕, 동북아, 풍뉴가, 관사24호, 파운드 등의 상점에 이 현판이 걸려있는데, 소제동 골목길을 걷다가 이 간판이 보인다면, ‘여기가 바로 옛 철도관사촌이었구나’라고 알아채기를 바란다.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소제동이 간직한 시간을 조금은 이해한 셈일 것이니.
소제동 골목을 다 둘러보는 데는 대략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본다면 20분 정도. 하지만, 20~3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소제동에 머무르는 사람은 없다. 옛 모습을 품은 지금은 힙해진 어느 가게 앞에 머물렀다가, 오래된 담장의 벽화에 시선을 멈추고, 스쳐지나온 골목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날씨가 제법 따뜻해지는 날, 자연스럽게 그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게 되는, 마성의 골목길 소제동에 가보는 건 어떨는지.
대전역에서 파운드를 목적지로 삼고 일단 출발해보자. 도로를 곁에 두고 파운드를 찾았다면, 그 골목 끝에 온천집이 자리한다. 된장 샤브샤브를 파는 곳. 맛도 맛이지만 외관이 예쁘고 마당이 넓어서 그 모습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자극적이지 않은 맛에 나이를 불문하고 찾아온다. 익선동에도 있는 곳인데, 소제동은 시간만 잘 맞추면 웨이팅 없이 먹을 수 있다.
우거진 대나무숲 사이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처음엔 찻집인지 몰랐던 곳이다. 다시 돌아서 와보니 다양한 차를 파는 곳이었다. 내부는 자리가 많지 않은데, 대나무숲 사이사이에 있는 자리까지 하면 충분하지 싶다.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은 조금 아쉬울 수 있지만, 소제동에 왔다면 풍뉴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차 음료를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