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좀 보세요! 화재가 난 것 같습니다.” 2012년 3월 15일 22시 30분경, 최초의 불씨를 발견한 이는 김태운 당시 주임[현 보령발전본부 (2발)발전운영1실 차장대리]이었다. CCTV는 지하 전력선 분배실을 비추고 있었고, 화면에서는 용접할 때 마냥 불꽃이 튀고 있었다. 연이어 폭발이 일어나고,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화재는 제어동에서 터빈동으로 넘어갔다. 이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파국은 보일러동까지 불길이 번지는 일이었다. 상탄설비의 벨트를 타고 혹은 석탄저장고를 따라 연료설비 쪽으로 화재가 번진다면 이는 보령을 넘어 전국적인 재난이 될 터였다. 다행히 기세 좋던 불길은 터빈동에서 진압되었다. 11시간 25분이나 계속된 사투를 끝내고 화재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입니다. 하계 전력피크 이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복구가 끝나야 합니다.” 외부 전문가들은 피해 복구에만 최소 6개월을 예상했다. 따라서 피해 복구에 더해 성능 정상화까지 3개월 남짓에 끝내겠다는 계획은 일견 현실성이 떨어져 보였다. 한여름 전력피크 전 복구 완료와 정상 가동은, 존폐의 위기 앞에서 그들이 쓸 수 있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였다. 먼저 복구를 위해 숙련인력들이 필요했다. 임락근 단장을 비롯한 47명 정예요원들로 성능복구단이 구성되었다. 이들의 첫 임무는 설비부터 확인하는 것이었다. 케이블을 타고 번진 불길이 특히 차단기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미세먼지가 다량 함유된 유독가스가 미세한 곳까지 파고들어 재사용이 가능한 설비가 하나도 없었다. 본부장급의 임원이 나서 국내외 50여 개 자재 공급 및 시공사 대표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리며 도움을 구했다. 자재 구매의 부담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해도, 정해진 스케줄은 충분히 ‘초인적’이었다.
“100일의 신화, 우리가 한다!” 성능복구단의 하루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특히 터빈동 철거는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었다. 각종 설비 및 배관의 손상을 막기 위해 대규모 장비를 투입할 수 없어, 일일이 수작업에 의존해 철거를 진행해야 했다. 청소작업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터빈동 대부분을 뒤덮은 그을음은 고압수를 뿌리는 것만으로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천정과 철골, 그리고 벽체에 사람이 매달려 꼬박 솔질을 해나가야 했다.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는 채 일에 파묻혀 살다보니, 어느새 ‘그 날’이 다가와 있었다. 5월 20일, 성능복구단은 보령화력 1호기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 6월 13일에는 발전기가 최초 연결된 데 이어, 일주일 뒤에는 신뢰도 운전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로써 보령화력 1호기의 생산 전력이 다시 국민에 전달될 수 있었다. 사고 이듬해는 ‘신 안전문화 구현’의 해로 지정했다. 모든 발전소가 참여하는 특별 안전의 날을 정해 관련 교육, 안전 사진전시회, 정밀 안전전검 등을 실시했다.
<보령화력 1, 2호기 성능복구 프로젝트 주요 연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