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몰랐다. 그저 남해와 진주를 향할 때 지났던 이곳이 이리 아름다울 줄이라고는. 계절의 색을 입은 길목의 나무와 산은 물론이거니와 가을빛을 담은 고요한 바다의 잔상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면면이 들여다보니 더욱 빛났던, 그래서 더 반가웠던 사천의 만추(晩秋).
여행길에서 들르는 사찰이 주는 매력이 있다. 괜스레 마음이 경건해지고, 복잡했던 생각들이 정리되는 기분이랄까. 사천의 다솔사로 가면 이런 기분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사찰의 이름과는 달리, ‘다솔’이라는 쉽고 예쁜 이름 덕분에, 기대가 된 곳이기도 했다. ‘차밭과 소나무가 많아서 다솔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 지나서 다솔사(多率寺)의 한자 풀이가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솔사를 둘러보고 나면, 차밭과 소나무가 많아 다솔일 것이라는 추측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소나무와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차밭이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점차 시들어 가고 있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다솔사 주지인 효당 최범술 스님이 1933년, 다솔사에 녹차밭을 가꾸면서 전통 차문화 복원과 대중화에 힘썼다고 한다. 이런 역사를 알고 나니, 다솔사의 이름에 차의 의미를 더해도 어색함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웅장하다기보다 소박한 느낌의 사찰 주변을 조용히 걸어봤다. 이른 아침에 찾아서인지 조용한 다솔사가 꽤 맘에 들었기 때문. 차밭 사이를 걷다 보면, ‘한용운 산책길’이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님의 침묵>을 쓴 시인이자 스님 한용운의 이름을 딴 산책길이다. 일제강점기에 그가 이곳에서 수도를 했던 이유로 그의 이름을 딴 산책길을 만들어 놨다고 한다. 실제로 다솔사 곳곳을 돌다 보면, 그의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한용운뿐만 아니라 소설가 김동리도 여기서 한동안 머물며 <등신불>을 썼다는 걸 보면 다솔사는 사찰 그 이상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곳임이 틀림없다. 계절마다 분위기를 달리하는 자연을 벗 삼아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복잡했던 머릿속을 정리해 주기에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사천에서의 아침을 산에서 보냈다면,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바다에서 오후를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해 최초거북선길이 있는 대포마을을 찾았다. 산과 바다를 같이 즐길 수 있는 게 사천의 매력이기도 하니까.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거북선을 사용해 대승을 거둔 사천대교 인근의 대포마을은 최초거북선길 2코스에 위치해 있다. 조용한 마을이지만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라 이순신체험마을, 모자랑포 등 주변에 볼거리가 많았다. 사천의 새로운 포토 스폿으로 떠오르는 대포항 방파제 끝의 조형물도 이곳을 대표하는 볼거리 중 하나다. 조형물의 이름은 <그리움이 물들면>. 이 조형물 하나가 가을 전어철이 아니어도 먼 데서부터 이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면 믿어지겠는가. 설치 미술가 최병수 작가의 작품이기도 한 ‘6m 높이의 조형물이 대체 뭐 길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천의 하늘과 바다가 만나 이 조형물과 어우러지면 새로운 작품이 탄생한다. 그야말로 사천의 대포항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이. 실제로 여기서 사진을 남기기 위해 일부러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꽤 된다고 하니, 사천을 찾았다면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팁을 주자면,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이 조형물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고.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노을을 품은 조형물의 모습은 담지 못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바다와 마을을 잇는 무지개해안도로를 달렸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사천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듯하여 사천바다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바다와 섬, 산을 잇는 코스로 구성된 케이블카라니 호기심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삼천포대교를 가로지르며 보이는 사천바다, 바다 곳곳에 설치된 죽방렴, 초양도까지. 그야말로 사천이 한눈에 보여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탑승하기 전에는 느리게 간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천의 자연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이대로는 아쉬워서 바다와 섬을 지나면 나오는 케이블카의 코스 각산 정류장에 내려 여유를 부려본다. 정류장에 내리면 각산전망대와 등산코스를 만날 수 있는데, 하늘과 맞닿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사천이 그리 아름다울 수 없다. 물론, 날씨와 계절이 아름다움에 한몫했지만. 바람 끝도 좋고, 더위도 추위도 적당한 때에 좋은 선택이었다는 걸 실감하며, 케이블카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걸 보니, 사천에서의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전국 9대 일몰지 중 하나라는 실안낙조를 보러 갔다. 구름이 짙게 깔리지 않은 날이라야만 제대로 된 일몰을 볼 수 있는데, 찾았던 날이 딱 그랬기 때문이다. 죽방렴, 섬, 등대가 오렌지빛 노을과 어우러지니 그림이 따로 없다. 노을이 사천의 온 바다를 덮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오랫동안 바라본다. 푸르기만 했던 바다도 포근한 빛으로 감싸는, 마치 오늘도 고생했다고 토닥여 주는 듯한 그 따뜻함이 좋아서.
사천은 노을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노을카페길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다. 노을을 기다리는 동안 커피 한잔하며 머물면 좋을 카페, 씨맨스. 사천 선상 카페로 이미 유명하다. 리뉴얼 전에는 외관이 집 모양으로 되어있어 노을과 함께 사진을 찍으면 색다른 느낌을 더했다. 리뉴얼 후 그 모습이 사라져 아쉽지만, 여전히 노을을 감상하기에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