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에 찬 목소리로 약을 광고하는 의사, 아기 사자를 낚아채는 독수리를 보고 단숨에 점프해 붙잡는 어미 사자.
그리고 그 영상 아래 달린 댓글 하나. “이거 다 AI로 만든 가짜임.” 우리는 지금, 슬롭 영상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글 편집실
유튜브 영상을 보기 전 뜨는 광고 하나. 한 의사가 나와 “제 키가 160인데요. 제 자식들은 170, 180입니다”라고 말한다. 또 다른 영상에서는 ‘전문가’가 “이 약 먹고 살 안 빠지면 저 고소하세요”라며 자신만만하게 주장한다. 처음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데 보다 보면 점점 묘한 느낌이 든다. 분명 다른 광고인데 목소리가 어쩐지 다 똑같고, 발음은 뉴스 앵커만큼 정확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아, 이 영상은 AI가 만들었구나.
요즘 세상에 AI로 영상을 만드는 게 큰 문제는 아니다. SBS 드라마 <모범택시 3>에서도 투견 싸움 장면은 AI로 만들었다. 문제는 따로 있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사실처럼 말하고, 근거 없는 정보를 전문가의 외피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AI 영상들이 SNS를 점령하고 있으며, 이 콘텐츠를 ‘슬롭(Slop)’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슬롭’은 원래 19세기에 ‘음식물 쓰레기’를 뜻하던 말이다. 미국의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는 슬롭을 ‘주로 인공지능을 이용해 대량으로 생산되는 질 낮은 디지털 콘텐츠’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지난 연말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됐다.
‘슬롭’이라는 단어가 ‘올해의 단어’로 꼽혔다는 사실은 이 현상이 이미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단순히 불쾌감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보는 사람을 교묘하게 현혹하며 상당한 수익까지 창출하고 있다. 실제로 식품의약품안전처는 AI로 생성된 허위 영상을 활용해 식품을 광고하거나 일반식품을 의약품으로 오인하게 만든 광고를 집중 점검했다.
그 결과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식품판매업체 16곳을 적발해 관할 기관에 행정처분을 요청하고 수사를 의뢰했다.
한편, 미국의 영상편집업체인 카프윙은 전 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슬롭 채널 영상 조회수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슬롭 채널을 가장 많이 본 국가 1위는 한국이며, 조회수는 84억 5,000만 회를 기록했다.
AI 활용에 대한 기준과 책임을 담은 가이드라인도 등장했다. 2026년 1월 22일부터 인공지능 활용에 대한 첫 포괄적 법률이 시행된다.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 이른바 ‘인공지능기본법’은 AI 기술의 발전을 장려하는 동시에 국민의 기본권과 사회적 신뢰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이 법은 AI 기술 전문가나 기업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챗GPT, 구글 제미나이, 미드저니 등 생성형 AI를 활용해 콘텐츠를 제작하고 외부에 제공하는 개인(크리에이터, 블로거, SNS 이용자) 역시 고지 의무를 지니게 된다. AI로 작성한 글은 물론, AI 음성이나 영상, AI 이미지 활용 콘텐츠는 모두 해당한다. 일부만 생성형 AI를 활용했더라도 전체 콘텐츠에 이를 명확히 표시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책임도 함께 커졌다. 그럴듯한 영상 앞에서 한 번 더 멈춰 생각하는 힘, 이 콘텐츠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묻는 태도. 조금은 번거롭고 귀찮아졌지만 슬롭의 시대를 건너가야 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일지도 모른다.